불온한 당신(Troublers 2015, 한국)|다큐멘터리| 2017.07.20 개봉|99분|15세이상관람가
상영일정 07/20(목) 17:00 07/21(금) 18:30 07/22(토) 16:10 07/23(일) 16:10 07/24(월) 12:45 07/25(화) 20:20 07/26(수) 16:20 07/27(목) 18:45 07/29(토) 19:30 07/30(일) 16:25 07/31(월) 18:35 08/01(화) 12:30 08/02(수) 10:45 20:30 08/03(목) 18:30 08/04(금) 12:40 08/05(토) 14:55 08/06(일) 18:00 08/07(월) 15:00 08/08(화) 16:45 08/09(수) 11:00 08/16(수) 10:40 14:30 08/17(목) 12:30 08/18(금) 16:25 08/19(토) 12:25 20:20 08/20(일) 19:15 08/21(월) 10:30 16:20 08/22(화) 12:30 20:20 08/23(수) 16:25 08/28(월) 18;00 (종영)
감독 이영
“여자를 사랑한 사람, ‘바지씨’를 찾아서”
1945년생 이묵은 ‘레즈비언’, ‘트랜스젠더’라는 단어가 국내에 들어오기 전 ‘바지씨’로 평생을 살았다.
서울에선 김승우로, 고향 여수에선 이묵이란 이름의 여자를 사랑한 사람으로 살아온 세월.
손에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여자를 사랑했고, 떠나 보냈지만 세상의 눈에는 그저 불온한 존재였던 사람.
한편, 2017년 대한민국의 광장에선 성소수자 인권을 지지하는 무지개 깃발이 나부끼지만 성소수자의 존재를
지우려는 혐오의 목소리도 점점 커져가는데…
우리 중에 누구인가요, 불온한 당신은?
관객프로그래머 프리뷰
️미루어진 존재들에 대하여
슬픔에 정도가 있다면 그것을 나누는 기준은 누가 정한 것일까. 슬픈 것보다 더 슬픈 것, 신성하게 슬픈 것 따위를 과연 나눌 수 있는 걸까.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기준에서인가. 어떤 것이든 답이 나왔다면 이번에는 다른 질문을 해보고 싶다. 그렇다면 존재에도 정도라는 것이 존재할까. 존재를 불온하고 덜 불온하고, 온당한 것으로 나눌 수는 있을까.
영화는 전혀 이어지지 않을 것 같은 현실들을 자르고 붙이는 것 외에는 아무런 기교를 부리지 않았다. 소수자들, 그리고 미뤄둘 수 있는 삶으로 치부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영상 속에 투박하게 담았을 뿐이다. 미뤄지고 지워진 존재들, 나라를 망하게 하려고 갑자기 어디서 툭 튀어나온 존재들. 영화 속에는 실체 없이 떠다니는 존재들만이 가득하다. 무엇이라 정의내리는 것조차 불온(不穩)한 존재들이 말이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그들이 불온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이들은 없다. 그래서 그들이 소위 말하는 ‘불온한’ 존재들에게 던지는 협박과 폭언은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대체 무엇을 잘못했다고, 무엇이 불온하다고, 누군가 나타나 내게 설명을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갑갑한 순간들을 몇 번이고 겪었으니 말이다.
누구를 만나고 있는지, 누구와 함께 살고 있는지를 강제로 입막음 당한 삶을 사는 이들이 원하는 것은 그저 ‘차별하지 말아 달라’는 외침이다. 그렇다면 몸을 던져 퍼레이드의 앞을 가로막는 이들이 전하는 것은 무엇인가. 존재를 인정해달라는 목소리를 기어코 폭언으로 누르고자 하는 것은 왜일까. 왜 존재를 인정받기도 이전에 종북게이가 되어야만 하는가. 나는 없고 있지도 않았던 정치적 성향 같은 것만이 남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이 기교 없는 영화는 내내 나를 대답 없는 물음과 분노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슬픔 앞에서 “언제까지?”를 외치던 이들은 어느새 퀴어 퍼레이드 옆에서 세월호 학생들을 추모한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모순을 부르짖는다. 그래서, 죽음과 인권을 부정당하는 삶은 결코 다른 것일까. 누가 무엇을 함부로 재단할 수 있는가.
서두에 내놓은 물음에 대한 나의 답은 존재에 불온함을 논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볼 모두가 생각해주기를 바란다. 불온한 존재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를, 미뤄지고 지워진 존재들이 과연 불온하다 말할 수 있는지를, 모두가 함께 크게 뜬 눈으로 보아주었으면 한다. by 주진하 관객프로그래머
2015년 출간된 책인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일반적으로 사람과 사람으로써 친절을 베풀 때 누구에게나 환대를 드러내지만, 사회의 성원권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요구하는 조건에 들어맞아야 되고, 이에 부합하지 않을 경우 사람(노예, 군인, 사형수)으로 보지 않는 차별이 있어왔다고 말이다.
이영 감독의 [불온한 당신]에 나오는 이묵씨는 여성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정체성은 남자로서 살아간 성소수자이다. 지금보다 사회의 성원권이 불가능했기에 음지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그 옛날을 증언한다. 당시 “치마씨”와 “바지씨”로 대표되는 한국의 1세대 레즈비언들의 세계부터 이묵씨가 자신의 성 정체성에 눈을 뜨던 어릴 때와 지금껏 만나고 헤어졌던 인연들에 대한 얘기들, 이러한 증언 사이 할아버지의 고향인 시골을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에는 다정하면서도 낙관적인 태도가 느껴진다.
그는 극 후반, 자신은 어려운 시기를 거쳐 왔지만 지금의 후배들은 더 나은 대접을 받을거라는 믿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불온한 당신]은 수구단체에서 주도하는 격렬한 반대 현장들에 좀 더 비중을 할애하면서 아직 성소수자들이 사회의 성원권안으로 들어가기에 진입장벽이 높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다. 성소수자의 권리가 포함된 인권조례들을 반대하는 수구단체(혹은 종교단체)들의 태도는 대화 자체를 거부하고 성경의 논리와 레드 콤플렉스를 들먹이고 더 나아가 정권이 저지른 잘못을 가리기 위해 세월호 유족들을 비난하거나, 노조를 반대한다.
[불온한 당신]이 성소수자 문제에서 세월호와 노조 문제의 한가운데 수구 단체들의 행위를 보여주는 순간들을 기억하자. 이 장면들에서 안정적 성원권, “평범한 사람“이라는 말둘은 모두 무색해진다. 대한민국의 사람들은 언제든지 ”종북“ ”빨갱이“라는 낙인이 붙여진 채 강제로 혐오와 차별을 겪는 약자가 되어 성원권 밖으로 밀려날 수 있음을 이명박근혜 정권때 경험하였다. ‘사람’이 아닌 약자가 됨으로써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물건으로 취급받게 되는 것. 이는 결국 성소수자,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를 넘어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 누구나 잠재적 ‘약자’가 될 수 있음을 얘기한다.
다행히 정권은 바뀌었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토론 당시 동성애에 대해 반대한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아직까지 성소수자들을 포함한 많은 약자들의 권리는 논의되지 못하는 동시에 “가만히 있어라”라는 명제는 우리의 무의식 기저에 작동중이다. 이 명제는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갔고 동시에 ‘나중에’와 같이 젠더적 사안, 인권, 권리에 대한 문제해결을 뒤로 미루자는 식으로 불식시키는 문제가 되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어떤 기독교인들은 퀴어 퍼레이드 현장 속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괴팍한 언어를 외운다. 눈과 귀를 닫는 듯한 이 순간은 상당한 촌극이지만 과연 이 글을 쓰는 나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눈과 귀가 닫히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좋든 싫든 [불온한 당신]은 혐오의 정서로 일상의 정치를 좌우하는 한국 사회의 민낯을 만날 씁쓸한 기회일 것이다.by 이석범 관객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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