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극장! 정기특별전! 관객프로그래머의 선택이 여러분들을 찾아갑니다!
5월 관객프로그래머 초이스! <더블 슬릿 >
일정: 05월 31(토) 오후 2시 GV: 홍진훤 감독
모더레이터: 이라진 관객프로그래머
<더블 슬릿> 추천사 – 패배를 가다듬어 가능성을 수확하기✍ by 이라진 관객프로그래머 |
선언과 혁명이 세계 속에 나뒹구는 염료로 덮였을 때, 우리는 무엇으로 패배를 상상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고개를 돌리면 어느덧 염료에 점령된 일상이 돌아가고 있을 때. 홍진훤의 〈더블 슬릿〉은 시네마스코프 화면비에서 양분되어 띄워진 두 개의 칸(채널)을 두고 멈출 수 없는 눈의 역량을 시험한다. 배열되는 이미지 사이의 가늘고 긴 검은 틈-막대는 현대중공업 비정규직 노동자 박일수의 죽음 이후 경험되는 세계―정규직 노동자와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위태로운 충돌―의 갈라짐을 더욱 뚜렷이 보여주는 듯하다. 그곳에서는 정신없도록 흔들리며 부딪히면서도 결코 서로를 발견하지 못한다(“박일수는 열사가 아니다.”) 하물며 우리를 분열로 밀어버리는 염료가 단지 그 세계 안에서만 변질되지 않고, 때로는 비참함을 안겨 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물론 넝마를 감추는 듯, 해방의 환상을 베푸는 듯, 가증스러운 착시는 이들만의 것이 아니다. (그러니 안심하지 말기를) 그리고 사건의 한가운데에서 가장자리로 향한 두 인물(시인 조성웅과 민중가수 우창수)의 이미지와 음성이 서서히 다가온다. 여기서 한 가지, 틈의 눈속임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개의 칸(채널)이라는 형식으로 들어간 사건, 인물, 이미지, 음성, 언어가 마치 전혀 마주할 수 없고,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이미지라는 시각적 교란. 이 단순한 착각은 영화가 시작됨과 동시에 발생하지만, 마찬가지로 두 개의 칸에 이미지가 나타남과 동시에 착각임을 깨닫는다. 틈에 의해 갈라진 바위, 무대 위에서 함께 노래 부르는 우창수, 자연과 기후를 이야기하는 이들, 노동자 투쟁의 사진과 푸티지, 울산 장생포 거리의 고래 동상, 침·뜸을 놓는 조성웅 등…. 당연히 목가적인 생활에 대한 유희나 파국적인 압박이 부여하는 절망에 천착하는 건 아니다. 쏟아진 염료를 이불 삼아 작동하는 절대적인 세계 안에서의 삶, 언어와 운율을 따라 가장자리로 나아가는 사람들, 발견하지 못하는 곳에서 발견을 상상하는 이들. 〈더블 슬릿〉은 오히려 우리라 부를 수 있는 실체를 겨냥한다. 양분된 두 채널은 우리로 하여금 눈을 굴리면서, 이전 혹은 동시에 등장하는 다른 편의 이미지를 기억하며 그 잔상을 남기도록 한다. 화면의 턱과 같은 검은 틈을 눈이 움직일 때 일종의 걸리적거리는 요소로 두는 것. 두 개의 칸의 존재를 극명히 드러내고 의도적으로 그 틈을 넘어가며 띄워진 이미지를 마주하도록 하는 것(이를테면 투쟁에 대한 불신과 울산 장생포의 고래 동상 이미지). 세계에 대한 혼란이 느껴질 즈음에 이미지는 칸을 벗어나 섞이며 화면을 가득 채우기도 한다(이를테면 매캐한 연기를 내뿜는 섬뜩한 불빛의 공장). 이러한 망각의 지연과 뒤섞임은 두 인물의 목소리와 합쳐지면서 증폭되고, 또 다른 상상을 만든다. 불안정한 뒤섞임을 맞이하는 건 우리뿐만이 아니라, 상상으로 틈을 넘어서게 되는 구성된 이미지 그 자체이다. 내게 틈은 상상을 위한 눈의 역량을 시험하는 띄움이자 이미지들이 스스로 춤추도록 부추기는 무대였다. 그렇기에 패배를 인식하고 가다듬을 수 있다. 위태로운 혼란을 들고 세계를 양분하는 경계에 맞닥뜨렸을 때의 괴로움, 그 속에서 우리를 애써 발견하지 않으려 염료에 기대는 자와 고개 숙이는 대지를 외면하는 우리…. 틈에 부딪혔을 때 느껴지는 통증은 제각기 다르다. 발가락을 부여잡으며 꼬꾸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뒤섞임을 바라보고 상상을 시작한다면, 바닥을 데굴데굴 구를 때 오염된 염료의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찌를 것이다. 눈물이 맺힐 만큼 지독하고 음울해서 다시는 저 틈에 다가서지 않고 새로운 염료를 찾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대신, 부식된 질료를 긁어내는 순간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지 않을까? 으악! 외치며 감춰진 패배를 잡고 가다듬어 불화에 묻힌 가능성을 수확하는 것. 절대적인 염료의 세계에서 가능성을 다시 캐오는 일만큼 눈부신 희롱은 없다. 틈의 구멍은 막혀있지 않다. 수확한 가능성을 들고 틈에서부터 출발하여 날아간다. 이들의 날림은 붙잡을 수 없는 곳으로의 애통한 상실이 아니라, 가능성의 펼쳐짐 혹은 우리와 자연 그리고 예술(시, 음악) 등의 손뼉치기다. 턱이 들쑥날쑥한 주행로 위를 가뿐히 거닐면서도 패배를 가다듬는 우리의 발걸음을 환희로 감싸안는 자들의 모습을 보라. 만일 이미지, 채널, 음성, 띄움, 그로 인해 만들어진 틈을 두고 상상하는 일이 허공에 매달리는 즐거움이라면, 오염된 염료의 조롱이라면, 우리의 몸짓이 단지 놀아날 뿐이라면… 나는 몇 번이고 놀아나고 싶다. 감싸안으면서, 손뼉을 치면서. 거짓된 환상을 저버리고 가능성을 수확하며. 요란한 물결을 한바탕 풀어낼 것이다…. |

감독: 홍진훤
2004년 2월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 박일수씨가 “하청노동자도 인간이다”로 시작하는 유서를 남기고 공장 안에서 분신을 했다. 사건 직후 하청노동자들은 현대중공업의 크레인을 점거하며 투쟁을 시작했지만 현대중공업 정규직 노동조합은 “박일수는 열사가 아니다”는 선언을 하고 열사의 영안실을 침탈해 하청노조 조합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추모공간을 파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노동자는 하나라는 계급운동의 마지막 풍경이었다. 당시 사내하청노조 위원장이었던 조성웅은 산으로 올라갔고 함께 투쟁하던 가수 우창수는 늪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시를 쓰고 동요를 만들며 여전히 화해할 수 없는 자본주의와 또 다른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혁명과 반혁명의 역사를 되짚으며 땅과 자연, 돌봄과 영성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것이 도래할 혁명을 준비하는 새로운 계급투쟁의 씨앗이 될것이라 믿는다. 박일수 열사 투쟁을 중심으로 산과 늪의 풍경에 언어가 얹혀지고 시와 노래가 패배한 계급투쟁의 역사를 가로지르며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질문한다. 두 개로 분할된 화면은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어떻게 충돌하고 화해하는지 감각하는 더블 슬릿으로 작동하고 파동과 입자가 본디 하나이듯 세계와 내가 하나임을 인지하고 감각하는 것이 어떻게 전혀 다른 혁명의 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는지 의심하며 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