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 김명준 감독 , 우: 권현준 프로그램팀장
* 박스글은 김명준 감독님 답변
권현준: <그라운드의 이방인>으로 대구를 찾아온 소감과 <우리학교>이후 8년이 지났는데 영화를 준비 한 계기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대구는 제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고 <60만번의 트라이> 때문에 작년에 여러 번 온 곳이라(웃음) 친근합니다. 그리고 8년 전 <우리학교> 공동체 상영 할 때 빔프로젝트 들고 여러 지방을 함께 돌면서 같이 고생한 권현준 프로그램팀장을 다시 봐서 반갑고 이렇게 뜻 깊은 극장도 운영하는 것도 참 감사하다고 생각해요. <우리학교>는 제가 다큐감독이라는 자각 없이 만든 영화라 일단 찍어보자 그러다 보니 잘 된건데(웃음). 사실 제가 본업이 촬영감독이거든요. 그런데 <우리학교>의 여파가 막 오는 거예요. 그래서 다큐든 극영화든 차기작을 고민하던 쯤에 <그라운드의 이방인>의 제작사인 인디스토리 대표가 제안을 해서 다시 다큐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사실 인디스토리 대표가 처음에는 같은 재일동포 이야기니 조언만 해 달라 부탁만 하셨는데 세 번 쯤 만나고 나서는 연출을 제안하셔서 당시에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본업이 촬영인데 이러다가 정말 감독이 되는 건가 그런 부담감도 생겼고 그러나 <우리학교>이후로 제가 재일동포 네트워크라든지 인맥이 형성된 상황이라서 해야 되겠다 운명 같다고 생각이 들어서 결국에 연출을 수락했습니다.
관객: 그럼 앞으로 계속 연출을 하실 생각이신지?
촬영 쪽에서는 1년 만 쉬어도 기술적으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도태된다는 느낌이 들게 됩니다. 제가 <그라운드의 이방인>이 5년 걸렸는데 다시 촬영을 하려고 해도 쉽지가 않아요. 게다가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학교> 이후 제 안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 점점 생겨나기도 해서 그래서 그게 다큐든 극영화든 어쨌든 연출을 많이 하려고 합니다.
권현준: 그럼 극영화도 준비하시나요?
네, 자꾸 여러 가지를 해봐야지 먹고 살 지요(웃음).
관객: 아직도 국내에서는 반일감정이 심하고 영화에서 나왔듯이 일본에서는 혐한감정이 저렇게 심한 상태에서 재일동포를 위해 저희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정치인이 아니라서(웃음). 2002년 재일동포를 처음 만나고 10년이 넘는 동안 문제점을 곰곰이 생각하고 지내왔는데 재일동포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근본적인 열쇠는 일본 안에 있다는 결론이 나왔어요. 요즘 조선학교와 재일동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는 선량한 일본인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영화에서처럼 혐한시위를 반대하는 반혐한시위도 점점 많아지고 조직화가 되는 경우가 많고요. 사실 조선학교도 일본에서 이때까지 70년까지 버틴 이유가 주변의 일본인들이 도움이 적어도 20% 정도는 있었기에 그게 가능했다고 봐요. 최근에는 일본정부가 고교무상화정책에 조선학교만 제외하면서 일본인들이 화가 많이 났어요. 조선학교를 차별하는 거는 아동을 차별 하는 것과 똑같다는 말도 나오고요. 아무튼 일본국내에서는 혐한에 대한 여론은 점점 나빠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면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하나. 당장에는 어떤 일이 있었냐면, 재일동포가 한국 사람과 결혼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그런데 일본인은 한국에서 이중국적이 허용이 안 돼요. 주민등록도 제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신용 카드는커녕 이마트 회원증도 등록이 안 되는 상황이 여태까지 진행되었어요. 근데 이게 올해 바꿨어요. 어째서 바꿨냐면 똑같은 사례로 재미동포들이 문제제기를 한 거죠. 이전부터 수십 년 동안 재일동포들은 문제제기를 했는데 재미동포 한마디에 바로 된 거죠(웃음). 그리고 조선적이라는 국적을 가지고 있는 재일동포들 정권이 바뀔 때 마다 입국자체가 허가 되거나 불허 됩니다. 이명박 정권이 딱 들어서자마자 한국영사관이 알아서 복종하는 거예요. 조선적 동포들이 비자 심사 할 때 왜 한국국적으로 안 바꾸나 그래서 나는 반쪽 조국은 싫다 그렇다면 차라니 일본국적으로 바꿔라해요. 그래서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 일본에서 학교에서 한국말을 가르치는 건 우리학교 뿐이라서 애들을 조선학교에 보낸다고 하면 차라리 일본학교에 보내라 해요. 지금 보수정권이 집권한지가 10년 가까이 되고 있으니 조선적 동포들은 서러워서 영사관에 가지를 않아요. 요즘은 조선적에서 한국국적으로 바꿔서 입국할 때는 따로 모와서 한국에 가면 이상한 집회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선서를 하게해요. 이런 식의 악랄함을 좀 고쳐나가야 하는 것이 제일 필요하다고 보고요(웃음).그리고 한국 안에 있는 살고 있는 외국인들 스스로는 한국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데 피부나 말씨가 달라서 고민하는 분들을 우리가 잘 포용할 수 있는 자세가 되어야지 재일동포와 일본과의 문제도 잘 해결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권현준: 영화에도 나오지만 몇 선수들 중에서는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을 꺼려하는 것 이 한국 안에 차별도 있고 일본에서도 차별 때문인 것으로 나오는데, 그 외에 82년도 멤버가 아닌 영화에 나오지 못한 다른 분들의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저희가 일본을 돌아다니면서 찾은 사람은 82년 멤버들뿐만 아니라 62년 멤버들 74년 멤버들도 찾았어요. 72년에는 한국에서 재일동포 문세광이 영부인 육영숙 여사를 8/15 행사때 총격으로 사망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 사건이 일어나고 한국사회는 이상하게 문세광은 사실 민단소속 청년회 사람인데 이 사람에게 총을 가르친 사람이 조총련사람이라서 문세광은 조청련이다 그래서 반조총련 기운이 광풍처럼 몰아치던 해였어요. 그런데 74년 멤버들은 결승까지 올라갔어요. 이 사람들은 어떻게 결승에 올라갔을까 결승전에는 어떤 사건이 있었을까 궁금해서 물어보니 74년 멤버들은 한국의 거리에 대한 기억이 없데요. 오로지 호텔과 야구장만 왔다 갔다고 관계자들이 절대 나가지 마라 왜냐하면 유니폼에 재일동포라고 쓰여 있느니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오로지 경기만 하라고 했답니다. 62년 멤버들 같은 경우는 거의 나이가 60대 초반인데 62년대 뛰었을 때 입었던 재일동포 유니폼을 양말까지 탁 내놓는 거예요. 너무 감동적이었죠. 이 사실을 대한야구협회에 알렸더니 야구박물관을 설립 할 때 소장 하고 싶다는 답변이 왔습니다. 그런데 한참 후에 다시 연락이 와서 일본에서 가져올 예산이 없으니 우리보고 가지고 오라고 부탁하더라고요(웃음). 한국프로야구가 700만 시대라고 하는데 그 돈이 어디로 가는지 아마야구는 예산이 심각할 정도로 없어요.
관객: 사실 봉황대기는 잠실야구장 보다 동대문야구장에 대한 추억이 많은데 영화에는 동대문에 이야 기가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영화 마지막에 시구 장면에 관객이 얼마 없는 게 정말 아쉬운데 감독님의 의도한 대로 시구행사가 잘 진행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동대문야구장에 대한 추억은 사실 영화에 담고 싶어도 82년 멤버들이 잠실에 대한 기억 밖에 없어서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저도 아쉬운 것이 동대문야구장이 그렇게 철거되면서 화려한 한국아마야구 시절을 야구팬들도 선수들도 추억하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인데 우리나라가 스포츠와 문화를 대하는 태도가 문제가 많죠. 시구장면 같은 경우는 정말로 프로야구가 이렇게 인기가 있는데 프로야구 개막식에 이들을 시구 할 수 있도록 한국프로야구협회나 프로구단들이 이것을 허용 할 수 있을까 저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불가능하다고 결론이 나서 대신 피디에게 부탁을 한 거죠. 그때부터 1년 동안 울상을 지으며 제가 언제 되느냐 라고 따질 때마다 한숨만 쉬고(웃음) 결국에는 피디가 성사를 시켰습니다. 피디가 개인적으로 삼미슈퍼스타즈의 임호균이라는 투수와 친분이 있었는데요. 임호균 투수랑 두산단장이 동창생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임호균 투수가 두산단장 손잡고 부탁을 했고 그렇게 성사 된 겁니다. 홈 개막 3연전 중에 마지막 날로 결정이 났는데 목요일 평일이고 하니깐 관중들이 많이오지는 않았죠. 그래도 저는 두산베어스에서 잘 기획을 해서 의미 있는 행사로 만들 줄 알았는데 처음에 시구 할 때 2명만 들어가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30년 만에 오신 분들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프론트에 울면서(웃음) 막 따져서 나머지 분들도 겨우 필드에 올라 갈수 있게 된 거죠. 게다가 마이크 잡고 몇 마디 할 기회도 없이 빨리 끝내고 들어가라는 분위기 이였어요. 그 현장을 찍으면서 시구는 성사되었지만 한 사람으로 야구팬으로서 우리나라가 정말 야구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맞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에 나오지만 82년 멤버들이 입장하기 직전에 SK선수단이 보이잖아요. 무표정에 앉아서 성의 없이 박수를 쳐요. 만약에 시구했던 사람이 가령 선동렬이었다면 저렇게 앉아서 성의 없이 박수를 쳤을까요? 이런 건 SK야구단이 잘못 된 게 아니랴 몰라서 그런 거예요. 저분들이 어떤 과정으로 왔고 한국야구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모르는 거죠. 그게 한국야구의 현실인거고. 시구행사는 던지고 받고 딱 1분 걸렸어요. 편집 할 때도 고민이 많았죠. 관중들이 없는 대신 효과를 많이 넣어서 하이라이트처럼 연출하면 어떨까. 그만큼 그때 상황들이 너무 아쉬었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은 초라한 잔치 상을 준비했지만 그분들은 정말 감동하시고 엄청나게 의미 있게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런 마음을 정말 표현 하고 싶었어요. 관객들도 저처럼 아쉽고 허무하게 느껴졌으면 좋겠지만 반면에 82년 멤버들은 기뻐하시고 이렇게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걸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권현준: 감독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야구선수들을 상대로 공동체 상영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드 네요. 아까도 말해지만 영화이지만 한국야구에 대한 중요한 자료이기도 합니다.
저는 야구관계자들이나 기자들이 많이 보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꼭 재일동포 아니더라도 우리들의 역사 안에 있던 사람들을 대우 해주고 다시 기억되게 해주는 의미 있는 시구들을 해야 하지 않나싶어요. 그래서 이 영화를 통해서 야구기자들이나 평론가들이 문제제기를 하고 프론트의 마인드가 변화하는 일이 벌어지길 바랐는데 영 안 되더라고요(웃음)
관객: 영화 시작과 끝에 파도가 울렁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어떤 의도인지?
그 바다가 현해탄이라고 불리는 곳인데요. 일본시모노세키라고 일본남단에서 간부연락선을 타고 우리 동포들이 해방되어서 돌아올 때 그 바다는 정말 짧은 거리지만 재일동포들의 한이 서려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영화 시작과 끝에 넣었고 실제로 56년 57년 2년 정도는 초기의 재일동포 야구단이 시모노세키에서 출발하는 화물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해서 기차로 서울로 도착했습니다. 첫 촬영을 할 때는 동포들처럼 배를 타고 가보자 의도도 있었고요. 1,2,3루를 돌아서 홈베이스로 돌아오는 것이 야구이고 인생에서 홈베이스는 고향인데 그 고향이 정말 고향이었는가 질문을 던지고 싶었습니다. 배수찬 선수 같은 경우는 3루에서 홈으로 못 돌아온 경우이고요.
권현준: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때 82년 멤버들이 가족들과 같이 영화를 보셨다고 하는데 반응이 궁금합니다.
가정이 있건 없던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그런 사람이 다고 말해면 안 믿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이분들이 부산영화제 올 때 가족을 동반 했어요. 나 이런 사람이야 이런 느낌이죠(웃음). 양시철 투수는 원래 집이 일본에서 차별 받는 그런 직종을 가지고 계세요. 우리나라는 소를 죽이고 돼지를 죽이고 고기를 파는 사람들이 더 이상 천한 직업으로 안 보잖아요. 일본은 아직도 돼지농장을 해서 고기를 파는 그런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천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종의 가업 같은 것이라서 거기서 탈출 하고 싶어서 야구를 하셨을 수도 있고요. 49세까지 결혼을 못 한 이유도 알 거 같고, 그런데 부산국제영화제 오셨을 때 부인이랑 같이 오셨어요. 1년 사이에 결혼을 하셨더라고요. 영화가 계기가 되는지 모르겠지만 30년 만에 동창을 만났는데 그게 자극이 되셨는지 아무튼 지금은 행복하게 잘 사십니다. 그리고 김근 선수 따님이 <60만번의 트라이>에 나오는 매니저랑 친하다고 합니다. 김근 선수 따님은 축구부 매니저였다고 하고요. 그래서 처음 김근 선수를 만날 때는 그냥 영화하는 사람으로 대했는데 자기 딸이 <60만번의 트라이>이야기를 하고 나서 아주 친해지게 된 거죠. 어쨌든 김근 형님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딸한테 나 이런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 하고 싶었겠지요. 요즘은 페이스북도 하시고 제가 뭐 올리면 좋아요도 눌러주시고(웃음)
권현준: 그렇다면 <그라운드의 이방인>은 출연한 주인공들에게 복동이 같은 영화 일수도 있겠네요.
반면에 배수찬 선수 부인은 굉장히 인생을 어렵게 살아온 분이셨어요. 남편 분 명성에 비해서 야구계 안에서 대접 받는 게 없어서 그런 것들이 한이 되었는데 이 영화를 보고 되게 고마워하시고 이제 겨우 좀 알려지는 구나 생각을 해주셔서 제가 오히려 감사하는 부분이 있죠.
관객: 이명박 정권 이후 조선적 동포들이 입국하는 게 어렵다고 하셨는데 82년 멤버들은 그런 경우가 없었는지?
한분은 일본국적으로 귀화를 하셨고 나머지 세분은 한국 국적 이였습니다. 재미있는 건 양시철 선수는 원래는 조선적 이였는데 이전까지 외국에 나갈려는 의지가 없었어요. 자기가 한국국적이든 조선적이든 정치에 관계없는 사람이라 이번에 부산에 온다고 국적을 바꾸셨어요. 이명박 정권 전이였더라면 조선적으로 오실 수 있었는데 스스로 큰 의미가 없는 분이라 괜찮았죠. 그런데 저는 속으로 좀 마음이 아팠습니다.
관객: 장훈이라든지 김성근 같은 현재 젊은 세대들이 알려진 재일동포 야구인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이유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사실 장훈, 김성근 인터뷰할 계획은 있었습니다. 그분들을 인터뷰 하려면 돈과 시간과 기다림이 많이 필요하겠죠. 그런데 그분들의 증언이 이 영화에 어울릴까 그걸 한번 생각해봤고 영화도 나왔지만 82년 멤버들은 자기들도 인정 하듯이 야구를 아주 특출하게 잘 하시는 분들은 아닌데 유명한 사람이 출연해서 증언 하면 기본적으로 신뢰감을 줄 수 있으나 전체적인 영화분위기랑 어울릴까 하는 고민을 한 결과 일단 민초들의 이야기에 집중하자고 결정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언급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기에 배수찬 선수 이야기를 영화 안에 넣었습니다. 김성근 감독이 배수찬 선수와 함께 안기부에 끌려간 사실은 한국기사에도 없고 김성근 감독 자서전에도 없는 이야기에요. 사실 한국기자들이 다 아는 이야기인 일본인이 쓴 책에만 있고 한국에서 어느 누구도 말을 안 해요. 야구만 하던 사람들이 정치 때문에 고생한 사람들 이야기가 또 나오지 않을까 재생산 되지 않을까 하는 의도로 집어넣은 것인데 지금 까지 개봉 한지 3주가 되지만 늘 김성근 감독 옆에 있는 기자들은 감독에게 질문을 안 해요. 누군가 특종을 생각해서 김성근 감독에게 질문을 할 줄 알았는데 그런 일도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배수찬이라는 선수를 왜 제대로 조명을 안 하지? 김성근 감독에게 영화를 드렸는데 김성근 감독은 왜 한마디도 안 하지? 그런 게 너무 아쉽습니다.
권현준: 이처럼 스포츠의 세계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많은데 82년도 팀이 결승에서 집니다. 결승전에 어떤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김명준: 영화에는 안 나오는데 74년도 이야기에요. 74년 봉황기할 때 재일동포팀이랑 붙은 팀이 김한근 장효조가 있던 대구상고였습니다. 그때의 일화를 하나 말하자면 심판들이 재일동포 포수가 한국말을 잘 모른 것을 아니깐 장효조 선수한테 “야 마음 놓고 쳐라”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장효조 선수는 양심에 찔렸는지 우승을 한 후 재일동포 감독방에 찾아와서 “감독님 죄송합니다 심판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라고 고백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봉화대기가 생기기 전까지 재일동포야구단은 전구 순회를 하면서 친선경기를 하고 스타대접을 받았지만 봉황대기가 생긴 이후 봉황깃발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일이 생기면 안 된다는 분위기가 형성 되었는데 솔직히 결승전에 상대팀도 한국야구의 명예를 걸고 싸워야 하는 입장이기도 했고요. 재일동포야구단도 알 고 있었죠. 한게임 이기면 이길수록 심판들이 노골적으로 한국고교야구팀에 유리하게 판정을 내렸으니 결승전은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경기다.
관객: 감독님의 <우리학교> <그라운드의 이방인>을 보면 재일동포들은 끊임없이 자기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유지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데 지금 한국에 사는 청년들에게 재일동포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고 함께 어떤 것을 해갈 수 있을 가에 대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영화감독이라서 이런 질문이 오면 난감합니다(웃음). 제가 운영하는 <몽당연필>에서 1년에 한 번씩 소풍이라고 해서 조선학교를 방문을 해요. 작년에는 본의 아니게 고등학생들을 데려가는 상황이 되었어요. 그렇게 한국 청소년들이 조선학교 애들을 딱 만났는데 어른들은 반공교육 때문이지 몰라도 약간 쭈뼛쭈뼛하는 게 있어요. 그런데 조선학교 아이들도 인터넷을 통해서 한국 이라는 문화를 너무 잘 아는 거예요. 그래서 애들은 자기들의 공통적인 주제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만나자 마자 금방 친하게 되더라고요. 단순한 친구가 생긴 게 아니고 다녀와서 애들이 글을 올린걸 보면 우리보다 필터 없이 서로 바라본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첫째는 만나야 한다고 보고 둘째는 만나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데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건 통일이라던가 아니면 동아시아의 평화라든가(웃음) 거대한 주제에 연결해서 재일동포들을 고민해보면 일본식민지잔재의 살아 있는 생명체적인 증거가 위안부 할머니들이고 또 하나는 조선학교라고 생각해요. 식민지배가 없었더라면 조선학교가 만들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70년 동안 끊임없이 탄압받고 있는데 이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북한과 일본이 평화조약을 하지 않으면 근본적으로 해결이 안 된다고 봅니다. 만일 북과 일본이 평화조약을 한다면 남쪽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잖아요. 그렇게 남북과의 갈등도 조선학교를 통해 해결 할 수 있다는 그만큼 역사적인 문제가 이 아이들이 통해 제대로 보인다고 생각해주시면 좀 더 관심을 조선학교에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권현준: 저도 이 영화를 보고 한국야구의 발전에 재일동포가 있어구나 알게 되었는데 알게 모르게 우 리 사회에 재일동포가 영향을 준 게 많구나 이 번 영화로 통해 관심을 가져 보는 게 어떨까 합니다. <우리학교><그라운드의 이방인> 이렇게 10년이 넘는 동안 재일동포는 감독님에게 뭐랄까 주어진 운명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앞으로 재일동포에 관련해서 어떤 활동을 하실 예정이고 차기작도 궁금합니다. 그리고 끝으로 오오극장에 오신 소감도 부탁드립니다.
아까 말했지만 몽당연필단체를 운영을 잘 해야 하고 지금 300명의 회원들이 있고 이분들이 도와주셔서 1년에 한 번씩 일본에 가고 한국에 조선학교를 알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관심 있으면 다음에 몽당연필을 치셔서 카페에 가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회원이 700명 정도 되어야 빚을 안지고 일하는 직원들이 그나마 밥을 먹고 살 수 있고 해마다 조선학교를 알리는 사업을 할 수 있습니다. 차기작은 다음에는 5년이 안 걸리도록 노력을 해야 할 거 같고(웃음) 재일동포 이야기가 되었든 다른 이야기가 되었든 우리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걸 말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오오극장에는 처음에 왔는데 정들었던 현준씨도 만나고 보면서 너무 좋은 거 같아요. 이렇게 가깝게 관객들을 만나는 게 처음입니다. 규모가 아니고 이런 식으로 가깝게 만나는 게 영화감독에게 자기작업에 대한 확신 혹은 반성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고 제 영화는 많이 안 보기 때문에 CGV에서 관객과의 대화를 하면 관객들이 저 멀리 있어요. 얼굴이 하나도 안 보어요. 여기서는 얼굴을 직접 보면서 이야기 할 수 있으니 너무 좋고 영화가 사실 여러 가지 스펙트럼이 있지만 이렇게 작지만 소중한 이야기를 담는 걸 많이 보시면 관객이나 우리국민들의 삶이 윤택해진다고(웃음) 아무튼 소중한곳이니 지켜주시고 자주 찾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끝)